프랑스 남부 도시 앙티브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 갔을 때 깜짝 놀랐다. 우리가 아는 피카소는 큐비즘의 대가이자,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산 위대한 예술가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릴 들었고 죽을 때까지 시들지않는 창의의 심장으로 세상을 살았다. 작품은 또 어떤가. 청색 시대의 작품들은 그가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한다.
입체주의로 넘어와서도 낯선 표현 방식을 뚫고 와닿는 것은 인간의 심연이었다. 게다가 얼마나 다작을 했는지. 워낙 혈기 왕성한 예술가니 머리 속에 넘쳐나는 이야기들을 그리고 또 그렸을 것이다. 사실 앙티브 피카소 미술관에 간다 하니 누군가 얘기해줬다.
"거기 볼 게 별로 없어요!"
하긴 미술관은 피카소가 그리말다 성을 작업실로 썼던 잠깐의 인연으로 만들어졌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기대가 됐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림들보다 본 적 없는 세계를 보고 싶었으니까. 미술관은 앙티브 항구 끝자락에 위치해 너무 아름다웠다. 오래 된 돌 건축이 다소곳하니 위압적이지 않았다. 세월을 견딘 돌들은 어딘지 다정해져 있는 것 같다. 가만히 손을 대보면 지나간 무구의 시간들이 느껴진다. 거기 기대어 드넓은 지중해 바다를 바라보며는 예술은 이미 삶에 깃들어 있다는 걸 깨달아버린다.
그런 깨달음의 순간이 너무 짧기에, 우린 금세 잊기에, 미술관이 있고 예술가가 존재한다. 우리가 얼마나 창의적인 존재인지, 세상은 얼마나 다양하고 신비로운지, 그걸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고 예술가란 생각이다. 내가 피카소 미술관에서 만난 것은 유명한 걸작도 눈에 익은 명화도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잣대로 보자면 너무 못 그린 그림이었다. 의미없어 보이는 선들, 장난스레 찍어놓은 점들, 그마저도 맘에 안들었는지 지우고 다시 그린 흔적까지.
이걸 피카소가 그렸다고? 실제 웃음이 터진다. 증명이라도 하는듯 피카소가 그 그림 앞에서 찍은 커다란 사진까지 전시되어 있다. 하긴 피카소는 말했다. 라파엘로처럼 그리는데는 4년 걸렸지만 어린 아이처럼 그리는데는 평생이 걸렸다고. 아이처럼 꾸밈없이 거침없이 그리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피카소는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천재들이 지니고 있는 천진함을 바탕으로 한, 유한한 세계에서 꿈꾸는 유희의 순간들. 그 순간을 영원으로 늘려줄 예술을 선택한거지.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재고 따지고가 없이 좋아하는 것들엔 돌격대같다. 여름 방학을 맞아 구로 문화 재단의 미술관에서 전시 연계 예술 수업을 진행했다. 백남준 판화전이 열리고 있어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준비했다. 그중 하루 내가 좋아하는 작품 한점 찾기를 했는데, 자, 지금부터 제일 좋아하는 작품을 잘 찾아보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격의 꼬마들이 됐다. 스무명쯤 되는 아이들이 자기가 고른 작품 앞에 앉는데 1분도 채 안걸렸다. 와! 이토록 분명한 취향이라니, 부러웠다.
우리 어른은 어떤가. 이거 고를까, 저거 고를까, 아까 것이 더 나은 것 같은데. 내 취향인데도 확신이 없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취향이 분명하면 까다롭다는 평판으로 돌아오기 십상이다. 그러다보니 점심 메뉴도 '아무거나'로 내 애호를 억압하고, '좋은 게 좋은거지' 애써 웃으며 착한 사람이고자 애를 쓴다.
하지만 '착한 사람'은 사회라는 시스템이 잘 굴러가기 위한 가스라이팅일 뿐, 나를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조금 더 취향을 가져도 된다. 가져야 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 볼 것 없다던 피카소 미술관은 우리가 가진 편견을 깬다. 피카소가 어떤 마음으로 그렸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그 바탕을 보여준다. 예술가가 평생을 그려도 걸작이라고 불리울 만한 작품은 많지 않다.
위대한 작가라고 해서 전 생애가 속속들이 엄청난 서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평범하고도 어쩌면 못 그린 그림을 꾸역꾸역 그리던 날들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도 빈 캔버스 앞에 서서 점이라도 찍던 시간들이다. 걸작은 그런 지루한 반복을 끝없이 하는 과정에서 간신히 겨우, 시간과 노력의 축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재미와 유쾌, 실험이 담긴 피카소의 엉뚱한 작품들을 오래 오래 들여다봤다. 피카소가 그린 모든 그림이 가슴 뭉클할 정도로 좋았다. 처음 보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담으며 나는 이제서야 제대로 그를 만난 것 같았다. 불현듯 지금 우리의 삶도 점을 찍고 선을 긋고,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그려보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걸작이라면 좋겠지만 그냥 평범한 삶이면 어때. 점 하나 찍는 순간 즐거우면 그만이지.
나중에 이 점들이 이어져 선과 면이 되고 구체가 되고 인생이 될터. 평생 아이같이 그리고 싶어한 피카소가 좋아졌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라고 말했는데, 그 어린이 우리 안에 다 들어있다. 오늘은 그림 한점 앞에 서서 내 안의 어린이에게 귀 기울여보는 시간이면 좋겠다.
#한경아르떼예술칼럼 #피카소미술관 미술관 정원과 바다, 피카소 드로잉 작품들
글 / 임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