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도 추상과 구상이 있다


행복에도 추상과 구상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정서적으로 충만한 행복과, 눈 앞에 보여지고 현실적으로 구현되는 행복. 전자는 추상화처럼 감정에 따라 모호하고, 후자는 구상화처럼 구체적으로 감각된다. 보통 어떤 행복이 더 소중한가 화두를 던지고, 행복은 물질적인 게 아니라 마음이라며, 정신 승리하자는 긍정 확언들이 많다. 그런데 행복은 진짜 추상적일까. 마음만으로 충분한걸까.

새끼 발가락이 골절되어 한여름에 반깁스를 했다. 집에서 의자 다리에 부딪혔는데 어이없이 골절됐다. 퍽 우스꽝스런 모습이지만 가족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게됐다. 이왕 이리된 김에 휴가겸 집근처 스타필드로 나들이를 갔다. 양쪽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오랜만에 아웃백에서 스테이크와 투움바 파스타 등 패밀리 레스토랑 기분을 냈다. 아이 어릴 때가 생각나서 그 얘기를 한참 했다. 꼬깔 모자, 생일 축하 노래, 폴라로이드 사진… 

내친 김에 영화도 보러갔다. 팝콘 큰통에 제로 콕은 기본이지. 가족 영화로 낙점 된 '좀비딸'. 기대하지 않았는데 엄청 웃었고 심지어 울었다. 영화관에서 가족들과 영화를 본 건 정말 몇년만이다. 우리는 함께 있는 내내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내내 서로 수다를 떨었고, 많이 웃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왔는데 셋 다 얼굴이 그리 밝을 수가 없었다. 아웃백, 스테이크는 좀 퍽퍽했지만 그래도 너무 맛있었어! 영화도 그 첫장면 너무 웃겼어! 오늘 우리 함께 보낸 시간들 너무 너무 행복했어! 

불현듯 행복은 자주 눈 앞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져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서 득도한듯 살던 이효리도 남편 이상순이 샤넬백을 사주자 우울이 단번에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참 솔직한 고백이다. 행복은 '감정'이라는 추상이지만, 그를 뒷받침해주는 '현실' 재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좋아하는 이들과 맛있는 걸 함께 먹고, 눈을 보고 웃고, 때론 값비싼 선물이 필요할 적도 있는 것이다. (글고 보니 이번 달에 내 생일이 들어있다, 흠냐!😆)

7월엔 꽤 긴 미술 평문을 마무리했다. 실컷 준비했던 예술 향유 필사책은 거의 다 써놓고 드롭했다. 공저 원고는 거의 다 모아져 두 팀이 출간 시동 중이다. 그림책 원고도 다 썼지만 출간은 아직 미지수다. 이 여름 모든 게 좀 느리고 불확실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다. 새끼 발가락 골절되니 공주 대접에, 가는 곳마다 걱정반 웃음반의 눈길.


무엇보다 삶의 속도를 확 줄이고, 생의 추상과 구상을 점검하는 이 시간이 좋다. 아쉬운 건 좋은 자리에서 와인 한잔 못한다는 것. 왜 꼭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걸까. 행복은 때로 나쁜 짓에도 제법 깃들어 있다니까.🤣

글 / 임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