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과 미술관


최근 이효리가 하는 프로그램을 보다 와! 감탄을 했다.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남편이 의자를 하나 만들며 보이지 않는 바닥까지 열심히 사포질을 하더란다. 거기 누가 본다고 그리 열심히 해? 타박하는 이효리에게 그의 말 한마디가 충격이자 돈오의 시간였다고.

"내가 보잖아, 내가 알잖아!"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만족을 위한 노력, 그것이 진짜 자존감이지. 나에게 그림과 글도 딱 그렇다. 누군가 날더러 SNS에 글 길게 쓴다고 지겹다거나, 글이 뭐 어떻다거나 말해도 빙그레 웃는 이유는 제일의 독자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 쓰는데 남들이 읽어주는 건 다만 고마운 일이지 평가는 다른 문제다. 나의 자존감이 좀 단단하고 안정되어 있다면 바로 예술 덕분이다. 지금은 명랑을 태도로 살고 있지만, 예전엔 신경이 섬세하고 예민해서 무엇을 하든 피로도가 높았다.


특히 서초동 학부모로 살 때 아주 힘들었다. 주변과 끊임없이 비교된다는 생각에 마치 매일 테스트 받는 기분이었다. 그럴 때면 습관처럼 미술관에 갔다. 과천 현대미술관 백남준의 다다익선 앞에서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고 마음을 어루만졌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을 드나들며 전시장의 적막과 고독의 기쁨을 알아갔다. 굳이 동행이 없어도 좋았다. 없어서 더 좋았다.

광활한 미술관을 나홀로 걷노라면 스스로 멋져서 입꼬리가 저절로 싱긋 올라갔다. 뾰족했던 감정은 어느새 평평해졌고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안도가 몰려왔다. 그러고나면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날카롭던 눈길이 부드러워졌다. 부서지기 쉬운 마음은 단단해졌고. 예술의 주체가 나라는 걸 알았고, 내 삶의 주인도 나라는 걸 알았다. 삶의 속도를 스스로 늦추고 그림 한 점 앞에 서는 일, 탁월한 사람만이 그리 한다고 주장한다.

미술관은 대체로 한적하고 여전히 우리 삶에서 멀리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혼자서도 씩씩한 당신, 정말 멋진 거예요! 정말 근사한 거고요!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탁월한 사람이니까요! 미술관에서 마주친 모두에게 웃는 눈이 된다. 막 엄지척 하고 싶어진다.


별 것 없는 인생이다. 보잘 것 없는 일상이고. 오늘은 어제와 반찬만 좀 다르고 내일도 그 밥에 그 나물일거라고 심드렁해하며 계속 별 볼 일 없는 삶을 살아갈텐가. 아니면 별같은 인생이다. 반짝거리는 일상이고. 오늘은 어제보다 즐거운 생각을 하고 내일은 또 다른 꿈을 꿀거야 악착같이 재미를 캐낼텐가. 삶은 기적이라지만 그 기적을 만드는 것은 내 눈과 마음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실제 시선을 따뜻하게 하고 마음을 유연하게 만드는 일은 너무 어렵다. 매일 똑같은 길을 걷고 비슷한 시간을 되풀이하면서 내 눈이 빛나고 마음이 커지기란 정말 힘들다. 우리에겐 새로운 어떤 능력이 필요해.

내 삶을 재밌고 특별하게 만드는 방법의 하나로 미술관 가기를 추천한다. 미술관은 젠체하는 이들이나 가는 거라고, 불편하고 어색하다고, 영영 담 쌓고 지내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예술이 뭐길래 사람들이 모이냐고, 도대체 나도 예술 좀 알고 싶다고 호기심 한움큼만 지니면 바로 향유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은 나의 자존감 성장과도 직결된다. 자존감은 외부에서 지켜주고 세워주는 걸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내가 나를 먼저 알아주고 안아주는 것, 내가 나를 이끌어 주고 이해해 주는 것. 자존감은 나로부터 시작되고 시야가 넓어져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힘이다.

미술관 느리게 걷기, 그림 한 점 앞에서 글쓰기, 그렇게 키운 자존감은 내 삶의 중심이 됐고 역량이 됐다. 내가 삶의 주체가 되면 비에 젖어도 우박에 놀라도 그 이후에 오는 것들을 기다릴 줄 알게 된다. 웃음 이면의 그늘도 받아들이고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을 껴안을 줄 알게 된다. 별 것 없는 인생에 별처럼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낼 줄 알게 된다. 가만한 응시와 짧은 기록만으로.

그래서 오늘도 아무도 읽지 않을 긴 글을 쓰며, 근사하고 탁월한 나를 만들어주는 예술 항유, 정말 멋지지 아니하냐고 답정너처럼 묻는 것이다. 이래도 미술관 안 가실 거냐고 눈을 동그렇게 하고서 바라는 것이다.


글 / 임지영


출처 : 매일경제 https://naver.me/5CpZL1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