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변해야 한다, 다양해야 한다, 각성해야 한다, 부르짖는 변기였던 것. 물론 그 당시에는 변기는 내쳐지고 도른자 취급을 받았지만. 그리고 이후에도 그의 행보는 일반적이지 않았고 여전히 그의 세계는 연구 대상이다.
혁신가들은 정을 맞기 마련이다. 일단 저지르고 보니 조금 엉뚱하고 보기에 불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높은 확률로 그런 사람들이 바꿔간다. 그럼 인공 지능 시대엔 누가 혁신가가 될까. 수많은 프롬프트를 써본 사람일까. 놀라운 기획서를 써내고 엄청난 그림을 척척 그려내는 A.I 에이전트를 부리는 사람일까. 단순히 그것만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뒤샹이 그림으로 고군분투하던 날들 없이, 아무 맥락도 없이, 그냥 변기를 전시했다면, 그것은 정말 이상한 짓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결국 시간과 마음을 헌신한 과정이 있었기에 결과는 존중됐고 궁극의 예술이 됐다. 지금도 그렇다. 삶의 축적없이 경험의 실체없이 사유를 외주화하는 A.I에만 의지한다면, 아무리 놀라운 결과물을 내놓는다 해도 그것은 깨진 변기와 같다. 결국 자기만의 서사와 이야기가 산처럼 쌓여있어야 해. 누가 알아주든지 말든지 차곡차곡 모아둬야 해. 인생 아카이브처럼.
그렇게 시간과 경험이 모여 나의 지평이란 것이 생겼을 때, 더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하고 싶을 때에, 그 때 질문하는 것이다. A I여, 무엇을 더 해야할까 혹은 더 빼야할까. 기발한 기획을 도와준다 해도 그것을 선택할지 말지도 내 능력이고, 구현할지 말지도 내 역량이다. 나의 삶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은 그냥 아이디어에 머물고, 방구석에서 손가락으로 하는 딸깍 생각만으로 세상은 커녕 나 자신도 바꾸지 못한다.
국립현대미술관 2026 올해의 작가상을 다녀왔다. 지금 현재의 동시대 미술을 애호하는 내가 무척 기다리는 전시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쏘아올린 작은 공들, 그 마음들을 가만히 건네보는 것만으로 눈빛이 섬세해진다. 뜨거운 계절 핑계로 두고 다니는 첨예한 감각이 되살아난다. 사실 작품이 어떻다더라 하는 평가 언어는 내겐 중요하지 않다. 그 공간의 도약하는 기세가 좋은거니까.
전현선 작가의 '보이지 않는 그림'을 원픽으로 골랐다. 그림을 원통형으로 이어붙인 대형 설치 작품인데, 원통형 안쪽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림의 뒷면들. 아무렇게나 싸인이 써있고 캔버스를 지지하는 나무들이 삐쩍 말라있는. 그러다 호기심에 주저 앉아 들여다보니 붕 떠있는 공간 사이로 그림이 보인다. 그것도 간신히 아래 부분만. 그런데도 좋다고 웃는다. 보이지 않는 걸 상상하고 엿보면서 무릎 꿇어도 키득거린다. 재밌고 독특한 생각을 펼쳐놓은 작가가 좋아진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혼자 그리던 날들은 흩어지지 않는다. 쌓인다. 혼자 쓰던 날들도 어디 안간다. 쌓인다. 혼자 웃던 날도, 혼자 아프던 날도, 혼자 생각한 날도, 가만히 그리고 정확히 가슴에 쌓여 스스로 좋은 질문이 된다. 그러므로 인공 지능은 앉아서 쓰는 게 아니라 움직이며 쓰는 것이다. 구체적 행위의 너무 좋은 동기 유발재인 것이다.
불같은 날들에도 삶의 순간들을 쌓느라 여념이 없는 우리들, 그 모든 게 가장 좋은 서사가 된다고 믿는다. 이야기를 품은 사람은 이길 수 없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내가 사는 눈 앞의 날들 정도는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질문만 하지 말고 움직여야지. 오늘도 으랏차.
글 / 임지영